‘하얀거탑’.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그리고 ‘봄밤’.
언뜻 보면 분위기도, 장르도 상당히 다른 드라마들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안판석 감독입니다.
안판석 감독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 뒤 그의 필모그래피가 다시 눈에 들어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두 편의 히트작이 아니라 시대마다 전혀 다른 작품으로 시청자들의 기억에 남았던 연출자였기 때문입니다.
별세 소식보다 먼저 떠오른 ‘그 드라마’
안판석 감독은 지난달 뇌출혈로 쓰러진 뒤 치료를 이어왔지만 8월 12일 향년 64세로 별세했습니다.
유작 ‘연애박사’ 제작진은 공식 입장을 통해 고인의 별세를 알리고, 유가족이 조용히 작별할 수 있도록 장례 절차를 비공개로 진행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소식을 접한 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역시 작품입니다.
“이 드라마도 안판석 감독 작품이었어?”
필모그래피를 다시 살펴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몇 번이나 들게 됩니다.
① ‘하얀거탑’이라는 강렬한 이름
안판석 감독의 대표작을 이야기하면서 빼놓기 어려운 작품이 있습니다.
2007년 MBC ‘하얀거탑’.
김명민이 연기한 장준혁을 중심으로 병원이라는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욕망과 권력, 인간관계를 밀도 있게 보여준 작품입니다.
단순한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 조직과 인간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드라마에 가까웠죠.
그리고 이 작품은 안판석 감독에게 중요한 기록도 남겼습니다.
2007년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연출상.
‘하얀거탑’으로 안판석 감독은 연출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한 사람의 성공과 욕망을 따라가는데, 어느 순간 조직 전체가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로 ‘하얀거탑’을 다시 떠올리면 안판석 감독 작품의 특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이것 같습니다.
② 그런데 ‘밀회’도 안판석이었다
시간이 흘러 또 하나의 강렬한 작품이 등장합니다.
2014년 JTBC ‘밀회’입니다.
김희애와 유아인이 주연을 맡은 작품으로, 당시 상당한 화제를 모았습니다.
‘하얀거탑’과 분위기는 전혀 달라졌지만,
인물 사이에 흐르는 긴장과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내는 연출은 여전히 강렬했습니다.
안판석 감독은 ‘밀회’로 다시 한번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연출상을 받았습니다.
2007년 ‘하얀거탑’.
2014년 ‘밀회’.
서로 결이 다른 두 작품으로 연출상을 받았다는 점도 그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③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또 달라졌다
그리고 2015년에는 SBS ‘풍문으로 들었소’를 연출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상류층의 허위의식과 계급 문제를 블랙코미디와 풍자를 섞어 보여줬습니다.
앞선 작품들과 비교하면 또 다른 분위기입니다.
그런데도 묘하게 ‘안판석스럽다’는 느낌이 남았습니다.
왜일까요.
결국 그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대상은 ‘사람과 관계’, 그리고 그 뒤에 있는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멜로를 찍어도 현실이 있었고,
사회극을 찍어도 결국 사람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④ 그리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2018년.
안판석 감독에게 또 하나의 대표작이 생깁니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손예진과 정해인이 출연한 작품입니다.
거창한 사건보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과 일상적인 감정을 세밀하게 따라가는 방식이 특히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주목받았습니다.
안판석 감독은 이 작품으로 2018 대한민국 콘텐츠대상 방송영상산업발전유공 드라마 부문 대통령 표창도 받았습니다.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순간을 특별하게 보여주는 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이 표현이 어느 정도 와닿을 것 같습니다.
⑤ ‘봄밤’까지 이어진 현실적인 멜로
2019년 MBC ‘봄밤’에서는 한지민과 정해인이 호흡을 맞췄습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후 다시 정해인과 만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 역시 관계의 감정을 빠르게 몰아붙이기보다 현실적인 고민과 주변 사람들의 시선까지 함께 담아냈습니다.
그래서 안판석 감독에게는 어느 순간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었습니다.
‘멜로 장인’.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보면 단순히 멜로 전문 감독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합니다.
한눈에 보면 더 놀라운 필모그래피
이번에는 대표작만 빠르게 묶어보겠습니다.
‘짝’ → ‘하얀거탑’ → ‘아내의 자격’ → ‘밀회’ → ‘풍문으로 들었소’ →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 ‘봄밤’ → ‘졸업’ → ‘협상의 기술’ → ‘연애박사’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장르의 폭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안판석 감독의 작품을 모두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맞았던 작품 하나쯤은 찾는 시청자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⑥ 최근까지도 현역이었다
이번 별세 소식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판석 감독은 과거의 명작만 남긴 뒤 활동을 멈춘 감독이 아니었습니다.
최근에도 꾸준히 현장을 지켰습니다.
지난해에는 이제훈, 김대명, 성동일 등이 출연한 JTBC ‘협상의 기술’을 연출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도 준비했습니다.
ENA ‘연애박사’.
김소현과 추영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안판석 감독에게는 결국 이 작품이 마지막 드라마가 됐습니다.
마지막 드라마는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
여기서 마음이 조금 묘해집니다.
‘연애박사’는 촬영을 마쳤고 관련 보도에 따르면 편집 작업도 완료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오는 10월 예정대로 방송될 계획입니다.
즉,
안판석 감독의 마지막 작품은 아직 시청자들이 보지 못했습니다.
감독의 별세 소식을 먼저 접하고,
그가 남긴 마지막 작품을 나중에 만나게 되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애박사’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처음 작품 소식이 알려졌을 때와는 조금 달라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대표작’으로 기억해 봅니다
안판석 감독을 어떤 작품으로 기억하시나요.
누군가는 ‘하얀거탑’을 떠올릴 겁니다.
누군가는 ‘밀회’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손예진과 정해인의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최근 드라마를 즐겨 본 시청자라면 ‘졸업’이나 ‘협상의 기술’을 기억할 수도 있겠죠.
서로 다른 세대의 시청자가 서로 다른 작품으로 같은 감독을 기억한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랫동안 작품을 만들어온 연출자가 남길 수 있는 가장 큰 흔적 중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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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판석 감독의 별세와 대표작, 유작 ‘연애박사’ 관련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뉴스1 안판석 감독 별세 관련 기사
마무리|결국 작품으로 오래 기억될 이름
안판석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살펴보니 이번 소식이 단순히 한 유명 감독의 별세 소식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하얀거탑’에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그렸고, ‘밀회’에서는 강렬한 감정을 보여줬으며, ‘풍문으로 들었소’에서는 사회를 풍자했습니다.
그러다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봄밤’에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할 법한 사랑과 관계를 섬세하게 담았습니다.
장르가 바뀌고 배우가 바뀌어도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꾸준했던 감독이었던 셈입니다.
무엇보다 ‘하얀거탑’과 ‘밀회’로 두 차례 백상예술대상 연출상을 받았다는 기록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어쩌면 시청자 각자가 간직하고 있는 한 장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공개되지 않은 마지막 작품 ‘연애박사’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는 10월 ‘연애박사’가 시청자를 찾아온다면 새로운 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과 동시에, 약 40년에 걸쳐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람과 관계를 이야기했던 한 연출자의 마지막 장면을 함께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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